마리앙투아네트와 측천무후 초상화
마리앙투아네트와 측천무후 초상화

2016년 출간 소설, 2019년 영화 개봉…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작품이 될 때마다 숱한 논란에 휩싸였다. 덕분에 베스트셀러 도서도 되고, 흥행 영화도 됐지만 21세기에도 여성의 목소리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목도한 탓에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역사 속에서도 여성은 얼마나 폄훼되어 왔나? 우리는 프랑스 혁명의 원인으로 루이16세의 왕비 마리앙투아네트를 곧잘 지목하곤 한다. 하지만 빵을 달라고 부르짖던 백성들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한 것은 마리앙투아네트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 측천무후는 어떤가. 그녀는 강력한 왕권주의로 역사상 유례없는 안정을 이룬 인물이지만 그저 폭력적이고 색을 밝히는 여성 황제로 묘사되곤 한다. 중국 서안시 건현 양산에 있는 당나라 고조 황제의 건릉에는 황제의 비석 옆에 아무 글도 새겨져 있지 않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이것이 바로 측천무후의 비석이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때문인지 남자들의 점유물이었던 역사는 측천무후를 권력에 사로잡힌 표독스러운 여성의 상징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역사가 그랬듯 현재도 그래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왜 82년 생 김지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 ‘측천무후’를 소설로 만나다

측천무후를 그저 당나라 고종의 황후로만 알고 있다면, 자신과 고종 사이에서 낳은 아들마저 죽여 황제 자리를 차지하고야 만 표독한 여성으로만 인식하고 있다면 역사적으로 큰 오류가 아닌가. 스스로 주나라를 세워 15년 간 중국을 다스린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 측천무후는 잔인한 폭군이자 권력의 화신이 아니다.

측천무후가 국정의 전면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취한 첫 조치는 본래 황태자였던 자신과 고종 사이의 차남 이현(李賢)을 죽인 일이다. 친위대 장군을 유배지로 보내 경비를 강화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장군은 측천무후의 뜻을 알아채고 이현을 자살하게 했다. 이런 탓에 측천무후를 일컫어 잔인한 폭군이라고 할지 모를 일이다. 이현의 죽음 이후 측천무후는 자신과 고종 사이의 장남 이홍을 황태자로 세웠었다. 하지만 이홍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사람들은 그 죽음을 측천무후의 독살이라고 여겼다.

사실상 예종을 폐위시킨 690년, 측천무후 자신이 제위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대주(大周)로 바꾸고 수도도 장안에서 낙양(신도(神都)로 이름을 바꿈)으로 옮겼다. 측천무후가 세운 주나라를 공자 시대 주나라와 구별하여 무주(武周)라 일컫기도 한다.

측천무후는 실권을 장악한 다음부터 공포 정치를 폈다. 그가 권력을 장악하기까지 또 권력의 정점에 오른 다음까지 포함하여 죽인 사람이 93명에 달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렇다면 측천무후는 잔인한 폭군에 불과한가? 중국 역대 황제들의 정치를 감안할 때, 측천무후를 특별히 정도가 심한 폭군으로 지목하기는 힘들다는 게 학자들의 중론이다.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그 잔인성이 유달리 부각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니, 측천무후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 아닌가.

더구나 측천무후의 치세는 정치적으로는 공포 시대였을지언정 백성들의 생활 측면에서는 대체로 안정을 누린 시기였다. 물론 그 안정이란 측천무후의 공이기보다는 당 제국의 기반이 그만큼 튼튼했기 때문이었다. 명문 귀족 출신이 아니었던 측천무후는, 가문과 혈통 중심의 아니라 능력 위주의 관료 등용이라는 기풍을 진작시켜 당나라의 전성기를 예비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문화적으로도 그는 당시의 뛰어난 많은 문인들을 적극 우대하여 화려하고 탐미적인 문풍이 꽃필 수 있게 했고, 불교 숭상을 통해 중국 불교의 융성과 발전에 기여한 바가 있으며, 공예, 도자기, 건축 등에서 당나라 특유의 미적 기풍을 진작시키는 데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소설 ‘측천무후’에서 저자 샨사는 서사적 관점에서 측천무후의 일대기를 기술하기 거부했다. 때론 치열하게, 때론 거리를 두고 그 삶을 대하는 그녀의 내적인 목소리를 일인칭 화자의 관점으로 전하는데 무게를 두었다. 역사소설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한편으론 어린 나이에 궁녀가 되어 종내 중국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한 여자의 내면을 그린 성장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 마리앙투아네트의 일생과 내면을 드라마틱하게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소설 ‘마리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는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이다. 이 책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역사의 희생양으로 미화시키거나 욕망의 화신으로 폄하하지 않고, 역사의 커다란 비극 앞에서 변화해 가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다. 평범한 한 개인이 져야 했던 역사적 책임, 황녀로서의 화려한 시작과 비극적인 최후, 불행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왕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모습 등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생과 내면을 드라마틱하게 그렸다.

그녀가 유럽 최대의 명문 합스부르크가의 황녀로 태어나 프랑스의 왕비가 된 것은 우연이었다. 그러나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것은 역사의 필연이었다.

그녀는 과연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이었을까? 허영과 음모의 대명사, 욕정의 화신, 빵을 요구하는 분노한 민중에게 우유나 고기를 권했다는 베르사유의 장미, 마리앙투아네트.

그러나 왕정이 무너졌을 때, 왕국을 위해서 또한 자신과 가족의 인간적 권리를 위해서 홀로 싸웠던 여자. 단두대에 서는 날 새벽, 자신의 목숨보다 더 오래 타오를 촛불 밑에서 그녀가 생각했던 사람 페르센은 누구였을까.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은 영화, 만화, 소설 등 다양한 장르에서 극적인 이야기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그녀의 삶은 사치, 낭비, 향락으로 프랑스 혁명을 재촉한 것으로 지목되는가 하면,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부당하게 폄하되고 마침내 죽임을 당한 비운의 여인으로 동정 받기도 한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세요” 마리 앙투아네트가 했다는 이 말은 그가 세상물정에 얼마나 어둡고 국민들이 처한 상황에 무지하며 무관심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되곤 한다. 프랑스 국민들이 먹을 빵이 없어 굶주림에 고통 받는다는 말을 듣자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와 같이 말했다는 것은 현재까지도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다. 그러나 실제로는 루이 14세의 아내였던 스페인 왕가 출신 마리 테레즈 왕비의 말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마리 테레즈가 “빵이 없다면 파이의 딱딱한 껍질을 먹게 하라” 말했다는 것.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실에서 유일하게 소작인의 밭으로 마차를 몰아 밭을 망치는 짓을 거부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프랑스에 불행을 몰고 오리라는 악의적인 선전에 시달려야 했고, 혼외정사를 하며 정부를 갈아치우는 음탕한 여자라는 소문, 동성연애를 한다는 소문, 그녀가 낳은 왕자가 루이 16세의 소생이 아니라는 소문 등 갖가지 나쁜 소문에 시달렸다. 라 모트 백작부인을 비롯한 일당이 추기경과 보석상을 속이고 왕비를 사칭하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한 일명 ‘목걸이 사건’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판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사건 연루자들은 재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소행임을 주장했고, 프랑스 국민들은 그들의 말을 믿으려 했다.

역사 앞에 헌신했지만 결국 사치의 대명사가 된 마리앙투아네트의 삶은 또 얼마나 억울한 것일까. 이 책 ‘마리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를 통해 그녀의 삶이 동정이나마 받기를.